아는 만큼 보인다, 면장이 다시 펼친 면지 이야기

내가 잘 아는 한 선배는 자신의 고향에서 면장을 지냈다. 그 형님에게 면장 시절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면에는 면의 역사와 마을, 유물, 농특산물, 인물 등을 기록한 면지가 있었다. 면장도 처음 부임한 뒤 그 면지를 펼쳐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오래되었고, 지금은 사라진 것들도 많아 보였다. 현재의 면정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한동안 옆으로 치워 두었다고 했다.

그곳은 인구가 1,200명 정도인 작은 면이었다. 고령화율은 50퍼센트를 넘었고, 젊은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가면 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자원도 활력도 없는 평범한 농촌처럼 보였다.

면정 현황 파악, 그 이름으로 시작된 여정

선배는 자신의 고향이니 지역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규모도 크지 않아 어느 마을에 누가 사는지, 어떤 곳인지 대략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면장으로 근무하면서 이 지역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농특산물도 찾아보고, 문화자원과 관광자원도 조사해 보았다. 그렇다고 별도의 예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면장이 지역자원을 조사하겠다며 새로운 사업을 신청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는 지역 현장을 다닐 수 있는 차량이 있다. 출장을 내고 차량을 운전해 관내를 돌아볼 수 있다. 면장은 이를 면정 현황을 파악하는 일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역을 둘러보고 마을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다녔다. 그런데 자주 다니다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의 비석 하나

어느 날 한 마을 입구에서 제법 잘 세워진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마을은 예전부터 성격이 강하고 자존심이 센 어르신들이 많았던 곳이라고 했다. 면장은 차를 세우고 가까이 가서 비석을 살펴보았다. 알고 보니 꽤 이름이 알려진 인물과 관련된 시비였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각 마을을 다닐 때마다 비석이나 기념물이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이것이 누구를 기리는 것인지, 언제 세워졌는지, 어떤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물었다.

그러던 중 옆으로 치워 두었던 면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그 안에는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던 비석과 인물, 마을의 유래와 이야기가 이미 적혀 있었다. 눈앞에 있었지만 알지 못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는 그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했다.

면지는 낡아 있었지만 쓸모없는 책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록은 현재의 현장을 이해하게 해 주는 지도였다. 기록을 읽고 다시 마을을 돌아보니 이전에는 평범하게 보였던 장소와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면 출신 인물들의 흔적을 연결하고, 비석을 찾아보고,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역의 모습이 조금씩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면장실에 오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그가 찾아다닌 것은 옛사람의 흔적만이 아니었다.

면장실에 앉아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마을 이장이나 기관·단체 관계자가 주로 방문했고,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요청하거나 민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면장실을 찾아오는 사람은 전체 면민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면사무소나 면장실에 오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노인들은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역에 남아 있는 젊은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다른 경제활동을 하며 삶을 꾸려 가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사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을을 다닐 때마다 젊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직접 집이나 작업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논농사와 밭농사, 과수원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시골밥상과 반찬을 만들어 소개하면서 유튜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공예에 관심이 있어 도시에서 이주해 공방을 연 사람도 있었고, 수석에 관심을 갖고 경매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단호박을 활용한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 젊은 다섯 명이 조합을 만들어 농업법인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겉으로는 노인들만 남은 조용한 농촌처럼 보였지만, 지역 안에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지역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많은 제약을 받는 곳이었다. 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환경은 깨끗했지만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산업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반드시 주민의 소득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는 농산물에 새로운 가치를 더했고, 누군가는 지역에서 콘텐츠를 만들었으며, 누군가는 손기술과 취미를 생업으로 바꾸었다. 면장은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지역을 설명할 새로운 재료가 이미 지역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종이책에 머물러 있는 기록

내가 이 면지와 면장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면지는 지역의 소중한 기록이지만 여전히 종이책에 머물러 있다. 그 안에는 마을의 역사와 인물, 유물과 지명, 농특산물과 생활문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책은 면사무소 책장이나 일부 가정에만 남아 있을 뿐, 새로운 세대와 외부 사람들에게 쉽게 닿지 못한다.

면지에 기록된 내용이 디지털 매체로 옮겨지지 못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존재를 아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다.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심해지며, 마을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면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는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면지를 인터넷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낡은 책을 스캔하여 올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거의 기록을 현재의 모습과 연결해야 한다. 면지에 나온 인물과 유적이 지금 어디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사라진 것은 왜 사라졌는지 기록해야 한다. 오래된 농특산물은 현재 어떻게 변했는지, 과거의 마을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 지금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더해야 한다. 귀농·귀촌한 사람, 농업법인을 운영하는 청년, 지역 농산물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 작은 공방과 콘텐츠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면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기록만 담은 면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함께 이어지는 살아 있는 면지가 필요하다.

지역의 이야기는 가내수공업처럼 시작된다

나는 면장의 이야기가 곧 지역을 스토리텔링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창한 관광개발계획을 수립한 것도 아니고, 많은 예산을 들여 전문업체에 조사를 맡긴 것도 아니었다. 직접 차를 몰고 마을을 다니며 비석을 살피고, 면지를 다시 읽고, 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한 일은 어쩌면 가내수공업처럼 소박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역의 이야기는 원래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지역자원을 관광상품으로 만들고,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은 반드시 거대한 시설이나 화려한 사업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을 다시 바라보고, 오래된 기록을 꺼내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역의 진짜 이야기는 외부 전문가가 어느 날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발견하고, 기록하며 조금씩 만들어 가는 것이다.

면지는 과거의 지역을 기록한 책이었다. 면장은 현장을 다니며 현재의 면지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면지와 현재의 이야기를 연결해 다음 세대가 볼 수 있는 형태로 남기는 일이다.

지역을 살린다는 말은 거창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을 기억하게 만드는 일은 지금도 시작할 수 있다. 마을 입구의 비석 하나를 다시 살펴보고, 오래된 면지 한 권을 펼쳐 보고, 면사무소에 오지 않는 주민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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