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지는 보통 10년을 주기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떤 곳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새로 편찬되기도 한다. 한 번 만들어진 면지는 면의 역사와 마을, 인물, 유물, 농특산물, 생활문화와 행정의 흔적을 오랫동안 담아 둔다.
그런데 정작 그 면지를 누가 읽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인구 1천 명에서 2천 명 정도의 작은 면이라면 면사무소 정원은 대략 20명 안팎이다. 10년 동안 인사이동을 거쳐 그 면사무소를 지나가는 공무원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면지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실제 업무에 활용해 본 직원은 얼마나 될까.
책장에 꽂혀 있다는 것과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자료가 없다”는 말, 정말 사실일까
공무원으로 일하다 보면 “자료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은 정말 이 조직 안에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지금 내 손에 자료가 없다는 뜻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자료가 만들어진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부서에서 이미 만들었을 수도 있고, 과거 담당자의 컴퓨터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문서등록대장이나 기록관에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고, 기본계획이나 용역보고서의 일부로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통계연보, 업무계획, 회의자료, 사업보고서 안에 흩어져 있을 수도 있다.
자료가 없다는 말에 앞서 그 자료가 어디에 있을지 충분히 생각해 보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자료는 자료의 존재를 알려 주는 또 다른 자료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료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알려 주는 자료’다.
책장 속에서 사라진 자료, 면지가 보여준 것
면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면지 안에는 마을의 유래와 인물, 비석과 유적, 오래된 사건과 지역의 자원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면지를 자주 접하지 않으면, 자료가 존재해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업무에서 활용되지 않으며, 결국 책장 속에서 사라진 자료가 된다.
자료가 사라진다는 것은 반드시 문서가 폐기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고, 찾지 않으며, 사용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도 자료가 사라지는 한 방식이다.
자료가 사라지면 누가 손해를 보는가
그렇다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먼저 새로 업무를 맡은 직원이 손해를 본다. 이미 조사된 내용을 다시 조사하고, 과거에 논의된 문제를 처음부터 확인하며, 같은 자료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낭비되고 업무의 연속성이 끊긴다.
조직도 손해를 본다. 이전 담당자가 쌓아 둔 경험과 판단이 다음 담당자에게 이어지지 않는다. 사업이 왜 시작되었는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무엇을 검토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사람은 계속 바뀌는데 조직은 매번 같은 자리에서 다시 출발한다.
지역도 손해를 본다. 마을과 사람, 산업과 문화에 관한 기록이 활용되지 못하면 지역을 설명할 근거가 약해진다. 공모사업이나 정책사업을 준비할 때도 지역의 강점과 변화 과정을 제대로 보여 주기 어렵다.
이미 있던 자료를 몰라서 다시 시작한 조사
자료가 없다고 생각해 새로 수집하고 관리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면장도 그랬다. 면의 자원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 마을을 다니며 비석과 사람, 농특산물과 생활의 모습을 하나씩 조사했다.
그러나 나중에 면지를 다시 펼쳐 보니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던 많은 내용이 이미 그 안에 있었다. 기존 자료를 제대로 알지 못해 새로운 조사를 시작한 셈이다.
물론 그 과정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록을 현재와 연결하고, 면지에 없던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더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 자료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조사 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미 기록된 내용을 다시 찾는 데 쓰인 시간을 현재의 변화를 확인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보완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통계연보도, 주요업무계획도 펼쳐 보지 않는 이유
이런 일이 면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직접 만든 자료도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 저장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파일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느 폴더에 넣었는지, 최종본이 어느 것인지 찾기 어려워진다. 하물며 몇 년 전 다른 직원이 만든 자료는 말할 것도 없다.
매년 통계연보가 발간되지만 한 번도 제대로 펼쳐 보지 않은 공무원도 많다. 시장이나 군수의 한 해 행정 방향과 주요 사업이 담긴 주요업무계획조차 읽지 않고 자신의 업무만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타 부서의 어느 팀이 수립한 수많은 기본계획과 용역보고서의 존재를 모두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종합발전계획, 복지계획, 교통계획, 농업계획, 농촌공간계획, 관광개발계획, 환경계획, 청년정책계획 등 조직 안에는 매우 많은 자료가 만들어진다.
한 공무원이 이 모든 자료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자료를 외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맡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 자료를 내가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 우리 부서에서 이미 관리하고 있는지, 다른 부서가 가지고 있는지 구분해야 한다. 외부기관의 통계를 찾아야 하는지, 기존 기본계획이나 용역보고서를 확인해야 하는지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자료 관리의 출발점은 파일을 잘 정리하는 기술보다 먼저 ‘필요한 자료는 어디엔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에 있다.
이 인식이 없으면 담당자는 자료가 없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새로 만들기 시작한다. 같은 조사를 반복하고, 이미 검토된 내용을 다시 검토하며, 비슷한 용역을 또 발주할 수도 있다. 반대로 자료의 존재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면 검색하고, 묻고, 확인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조직의 자료 접근성을 높이는 일곱 가지 방법
그렇다면 한 조직 안에서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 자료 자체보다 먼저 자료의 목록이 필요하다.
조직 안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문서를 한곳에 모으는 것은 어렵다. 대신 어떤 부서에서 어떤 계획과 보고서, 통계와 조사자료를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목록은 만들 수 있다.
자료명, 작성연도, 담당 부서, 주요 내용, 보관 위치 정도만 정리해도 큰 도움이 된다. 자료 전체를 옮기지 않더라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만 알면 된다.
이 목록은 일종의 조직 내부 자료지도다. 면지가 마을의 역사와 자원을 알려 주는 지도라면, 자료목록은 조직 안에 축적된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지도다.
둘째, 자료를 사람의 기억에만 맡겨 두지 않아야 한다.
“그 자료는 예전에 김 주무관이 만들었다”, “박 팀장 컴퓨터에 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관리되는 자료는 담당자가 이동하면 함께 사라진다. 개인 컴퓨터와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공용 저장공간과 기록체계 안에 남겨야 한다.
담당자가 바뀌어도 찾을 수 있도록 파일 이름과 폴더 구조를 일정하게 정하고, 최종본과 작성 중인 자료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원칙도 필요하다.
셋째, 자료를 만들 때 검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파일 이름이 ‘최종’, ‘진짜최종’, ‘수정본’, ‘최종수정2’로 되어 있다면 나중에 내용을 찾기 어렵다. 자료명과 연도, 사업명, 담당 부서가 파일 이름에 드러나야 한다.
문서 안에도 작성일과 담당 부서, 자료의 출처와 기준을 표시해야 한다. 그래야 몇 년 뒤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어떤 자료인지 판단할 수 있다.
넷째, 업무 인계는 진행 중인 일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자료의 위치와 맥락까지 넘겨야 한다.
일반적인 인계인수서는 현재 추진 중인 사업과 해야 할 일을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러나 중요한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계획을 참고해야 하는지, 과거에 어떤 검토가 이루어졌는지도 함께 남겨야 한다.
“이 사업은 어느 기본계획에서 처음 제시되었는지”, “관련 통계는 어느 기관 자료를 사용했는지”, “주민 의견수렴 결과는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자주 활용되는 기초자료는 여러 직원이 쉽게 볼 수 있어야 한다.
통계연보, 주요업무계획, 조직의 중장기 발전계획, 부서별 주요 기본계획은 특별한 자료가 아니다. 조직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자료다.
그러나 발간했다는 사실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직원들이 쉽게 검색하고, 필요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새로 부임한 직원에게 이러한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는 과정도 필요하다.
여섯째, 자료를 보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사용해야 한다.
사용되지 않는 자료는 점점 잊힌다. 면지가 책장 속에만 있었기 때문에 사라질 뻔했던 것처럼, 조직의 자료도 업무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지 않으면 존재감을 잃는다.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때 과거 자료를 확인하고, 업무보고를 작성할 때 이전 실적과 비교하며, 공모사업을 준비할 때 관련 기본계획을 찾아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자료는 사용할수록 가치가 드러나고, 잘못되거나 오래된 내용도 발견된다.
일곱째, 자료를 찾는 능력을 개인의 성실성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경험이 많은 직원은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알고, 어떤 계획에 필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지 감으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신규 직원이나 새로운 업무를 맡은 사람에게는 이런 감각이 없다.
좋은 조직이라면 자료를 잘 아는 몇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필요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검색 체계와 목록, 공용 보관공간과 인계 방식이 필요한 이유다.
완벽한 시스템보다 목록 하나부터
모든 자료를 한곳에 모으는 완벽한 시스템을 처음부터 만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려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할 수 있다.
먼저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기본계획과 통계, 주요 보고서의 목록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각 부서가 보유한 핵심 자료를 몇 개씩 등록하고, 새로 작성되는 계획과 보고서를 계속 추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료를 새로 만드는 능력만이 아니다. 이미 만들어진 자료를 찾고, 이해하고, 현재의 업무에 연결하는 능력이다.
자료가 없다는 말은 때로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기 전에 한 번은 물어야 한다.
정말 자료가 없는가. 아니면 내가 그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인가.
조직의 자료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산이 되지 않는다. 필요한 사람이 찾을 수 있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업무에 다시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산이 된다.
면지가 과거의 지역을 담은 기록이라면, 조직의 수많은 계획과 통계, 보고서와 회의자료는 행정의 면지와 같다. 그것을 읽지 않고, 찾지 않고, 연결하지 않는다면 조직은 많은 기록을 가지고도 기억이 없는 조직이 될 수 있다.